서울]여러분은 장충단 공원의 의미를 아시나요? 장충단공원

2015. 4. 3. 07:00국내 여행/서울 가볼만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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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여러분은 장충단 공원의 의미를 아시나요?

 

안개낀 장충단 공원 ~~ 으로 시작하는 옛 가수 배호선생의 노래에 등장하는 장충단 공원

많이 들어 보셨고, 오다 가다 보셨던 기억들이 있으시겠죠?

하지만 장충단공원의 의미를 알고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드실겁니다

오늘은 장충단공원을 소개합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리면 바로 장충단 공원 팻말이 보입니다.

사거리 건너 새로이 개장한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이 보이고 그 건너에는 유명한 장충동 족발집들이 있구요

 

 

 

 

입구에는 장충정이라는 정자가 우리를 맞이 합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이 신라호텔이네요

 

장충단 공원 약도

 

 

 

약도를 자세히 보시면, 장충단 공원안에는 수표교, 장충단비, 사명대사 동상, 파리장서비, 이준열사동상, 이한용선생기념비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장충단 공원이 뭔가 문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란걸 알수 있겠죠 ^^

 

 

장충단 공원 수표교

 

건너편에 보이시는 다리가 수표교입니다.

 

 

 

 

뒤에 장충단 비가 보이는데요, 장충단비는 을미사변때 희생된 분들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에 세워진 비석이라고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1895년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께서 시해되시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하셨는데 고종 황제께서 1900년 이들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고

이때 비석도 같이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제가 장충단을 그냥 둘리가 없었겠죠

이후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구요, 1920년 후반에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장충단 공원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다 1969년 이곳으로 옮겼고,

비석의 앞에 새겨진 장충단 奬忠壇  글씨는 순종황제의 글이며, 후면에는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비문을 썼다고 합니다

 

 

 

 

 

공원의 입구에 있는 이곳이 바로 장충단터 였습니다.

그곳에 장충단 비를 다시 옮겨 세웠구요

 

 

 

장충단 터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하여 광무4년 설치했던 제단터

 

 

 

장충단비

 

 

 

 

 

장충단비를 지나 수표교에 다다랐습니다.

수표교는 서울시 유형문화제 18호이구요, 예전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작 시기는 조선 전기인 태종~세종 연간으로 추정되고,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때 철거하여 1965년 이곳에 옮겨졌습니다.

 

 

수표교

 

 

 

수표교

 

 

 

다시 공원 입구에서 오른쪽 언덕위를 올려다 보면 사명대사 동상이 있습니다.

계단을 열심히 올라가도 되구요, 지하철역에서 동국대학교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도 됩니다

 

 

 

 

 

다시 공원으로 돌아와 한참을 걷다보니, 파리장서비라는 비문이 보이네요.....

좀 낯선 이름인데요

 

 

 

 

내용인즉, 유림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서한을 장서 長書 라고 합니다.

장서를 가지고 해외로 파견되었던 분이 심산 김창숙선생으로 임시정부 독립운동과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엮임하셨던 분입니다

 

 

 

 

 

이쯤되면 이곳이 그냥 노래 가사에나 흘러나오는 그런 곳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소나무들의 모습이 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그 옆에 이준열사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광무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도착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을사조약이 무효이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였으나 외국 열강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자결함으로써 뜻을 만방에 떨치셨죠....

 

 

 

 

 

 

 

 

옛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열사들의 모습이 이 결개 굳은 소나무에 투영되는 듯

마음이 무겁고 또 무거워집니다

 

 

 

 

 

 

 

공원 뒤쪽에 차와 음식을 드실수 있는 전통찻집이 있습니다

 

 

 

 

 

 

옆에 이한응선생의 기념비가 있군요.

이한응 선생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의 3등 참서관으로 런던에 부임했다,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함에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국가임을 런던내 각국 영사들에게 피력하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5년 런던에서

자결하셨습니다.



 

 

 

 

이한응선생의 기념비앞에서 보면 이준열사의 동상이 옆에 보입니다

 

 

 

 

공원을 나서, 리틀야구장 뒷 언덕을 올라가면 외솔 최현배선생의 기념비도 있답니다

 

 

어떠셨나요?

장충단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순국 선열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저도 이해가 되었답니다.

그냥 그냥 지나쳐가고 의미없이 노랫가사에나 읊어대기에는 너무다 무겁고 의미있는 곳이었습니다

 

 

혹시, 남산을 가신다거나 근처에 들를 일이 있으시다면 잠시 장충단 공원의 의미를 짚어보고

찬찬히 한번 둘러 보시면 어떨지요?

 

다음 메인과 티스토리 추천글에 소개되었습니다 축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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