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화, 고향의 봄, 퐁당퐁당의 작곡가 홍난파선생이 살던집, 홍난파 가옥 (홍난파의 집)

2022. 6. 26. 07:00국내 여행/서울 가볼만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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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고향의 봄, 퐁당퐁당의 작곡가 홍난파선생이 살던집, 홍난파 가옥(홍난파의 집)

070-8112-7900 서울 종로구 송월1길 38, , 2-46 (홍파동)


강북삼성병원과 돈의문박물관마을 사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다 보면 담쟁이가 벽을 감싸고 있는 외국풍의 아담한 건물 하나가 보입니다. 이곳이 봉숭아, 고향의 봄을 작곡했던 홍난파선생이 말년에 머물던 자택으로, 지금은 국가등록문화제 90호로 등록되어 있는 홍난파 가옥(홍난파의 집) 입니다.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 건물로 당시 서양의 건물 양식을 따라 지은 곳이어서, 홍난파선생의 이력 뿐만 아니라 당시의 주택양식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코로나때문에 한동안 외부에 공개하지 않던 곳인데, 얼마전부터 사전 예약제로 내부 시설도 공개하고 있습니다.

 

홍난파 선생의 말년 친일행적 여부로 좋지 않은 눈길도 받았던 곳입니다만, 지나는 길에 만난 오래전 이야기를 담은 집으로 소개를 해 보겠습니다

 

홍난파가옥 홍난파의 집 위치

 

홍난파 가옥 : 서울 종로구 송월1길 38, , 2-46 (홍파동)
전화 : 070-8112-7900  실내는 전화예약제로 운영중

 

홍난파 선생은?

먼저 홍난파의 집으로 알려진 곳이니, 홍난파선생의 이력에 대해 살펴 보고 가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가곡인 봉선화, 퐁당퐁당 고향의 봄같은 주옥같은 곡들을 작곡한 홍난파선생의 본명은 홍영후이고 난파는 그의 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하고, 1936년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지휘한 이력이 있습니다
홍난파 선생의 이력은 식민시대 지식인의 삶의 단면을 보여 주는데요, 도영음악하교 재학중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바이올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었던 이력도 있었습니다.

 

3.1운동 전력으로 다니던 동경음악학교로의 복학이 불허되자 귀국하여, 지은 애수 라는 곡명에 김형준선생이 가사를 붙인 대표적인 곡 , 봉선화가 탄생합니다. 당시 나라를 잃은 설움을 표현한 곡으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기도 했죠
그후 미국 음악공부를 떠나 귀국하여 경성중앙방송국 경성학교 관현악단을 조직하였고 1929년에는 고향의 봄이 실린 조선 동요 백곡집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운명이 바뀐 사건인 흥사단 단가를 작곡한 이유로 일제에 고문을 당하고 이후 사상전향서를 쓰고, 친일 활동의 이력으로 지금은 친일 행적의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홍난파 가옥 , 홍난파의 집

홍난파 가옥은 지하1층 지상1층의 벽돌 건물입니다. 인근 송월동에는 독일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송월동 인근에는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이 주택도 당시 독일인 선교사가 지내던 집으로, 홍난파선생이 구입하여 6년간 지내며 말년을 보내게 되어 지금의 홍난파가옥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월암근린공원으로 연결되는 데크

 

 

 

홍난파의 집

멀리서 보기에도 파란 담쟁이가 온통 집을 둘러싼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네요. 건물의 모습도 앞에 서술한 것 처럼 당시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어, 인근의 주택들과는 다르게 눈에 뜨입니다

 

가옥 입구에는 홍난파선생의 동상이 있습니다.  당시 홍난파선생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내용의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인근 지형이 경사진 곳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단층집처럼 보여도 왼편은 경사면을 이용해서 지하 1층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끔씩 이런 담쟁이 넝쿨이 덮여 있는 주택들을 본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다지 보기 어렵죠;

 

 

주변의 모습은 그냥 아기자기 예전 모습을 잘 꾸려나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집 그 자체입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가옥의 입구인데요

 

 

작년에는 코로나로 실내 오픈을 하지 않았고, 지금은 사전 전화 예약을 통해서 내부 관람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홍난파의 집 개관 안내
하절기 ( 4월 ~ 10월 ) : 오전 11시 ~ 17시 까지
동절기 (11월 ~ 3월) : 오전 11시  ~ 16시 까지
주말 및 공휴일은 휴관

 

저는 오늘은 사전 예약이 되어 있지 않아 내부 구경은 하지 못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오래전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담쟁이 넝쿨 집을 보는 것 만으로도 왠지 모를 향수 같은 것도 느껴지고, 당시 혼란스럽고 나약해진 지식인의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홍난파선생 역시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 (1941년 8월 30일) 하게 되어, 끝내 이런 번민을 안고 가셨겠죠.

 

 

지금은 이 인근에서는 꽤 많이 알려져 있어, 제가 간 날도 2팀이 홍난파 가옥을 보러 오셨습니다.
대부분 사전 예약을 모르고 오신 분들이었어요

 

 

집의 옆과 뒷편으로 돌아서니 정말 담쟁이 숲속에 집 한채가 덩그러니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주택을 구입후 6년간 지내다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하신 걸 봐서는, 향후 독립에 대한 확신도 없고, 다만 원하지 않는 친일 행사를 한다고 해도 가시는 길에 무한한 혼란이 남았을 겁니다

 

 

오랫만에 집 전체를 담쟁이 덩굴이 두르고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홍난파가옥을 돌아봤습니다. 
역사의 물결은 사람의 의지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그 시험에 떨어진 지식인들은 무한한 자존감 상실과 괴리됨을 느꼈을 겁니다. 이후 홍난파선생의 족적보다는 그냥 아주 오래되고 우리 정서를 대변하는 고향의 봄이나 봄처녀만이 선생의 빈자리를 지금껏 메꿔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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